천재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난 어린 시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도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고. 재능을 주었으면 그에 걸맞는 다른 장점들, 하다못해 지혜를 깨달을 시간이라도 주었어야 한다. 난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왁스와 윤활제 밖에 없고,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정자들은 이 화장실 안에서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하지만 난 억울하지 않다. 내일 하늘은 무너질 것이다.


다짐했고 혈서까지 썼다. 그렇게 하고 나니 뇌 속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아니면 아닌가? 라이터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나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는 악의가 저 세상 속으로 팽창해보기 위해 터질 듯 끓어오르고 있다.


......여덟시 뉴스입니다. 광화동의 한 빌라에서 33세의 A씨가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A씨는 직장에서 만났던 B씨에게 지속적인 협박과 스토킹을 받고 있었고......


난 모니터를 향해 은니가 박힌 치아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술잔을 두 개 채웠다. 한 잔은 내 몫이었고 한 잔은 이제 구금된 범죄자의 몫이었다. 안녕. 내가 들을 수 없는 귀에 대고 인사한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천재라고 말했다. 난 어렸을 때 침울한 기질이 있었고 친구도 거의 없었지만, 한동안 그런 명칭에 익숙해지다보니 언젠가부터 나도 내가 정말 똑똑한 줄 알고 살았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나의 엄마를 불러 직접 그 단어를 사용했다. 엄마는 그냥 웃어 넘겼다- 철 없던 때는 서운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일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환자마냥, 나 자신을 '지나치게 특별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천재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내가 쓴 시들을 보고 너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느니 어린애 같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하더니 급기여는 천재라고 불러줬다. 칭찬을 듣고도 수치스러울 때가 있다. 난 그 때 그런 시선을 이해하고 갈망하기에는 어렸나 보다. 내게 처음에는 수치심을 다음에는 멀쩡했던 머리를 썩혀버리는 오만함을 남겼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도 못됐다고 말하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나라고해서 인정받는 게 싫었을 리가 없다. 단지 그보다는 다른 애들이 맨날 듣는 칭찬을 나에게 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원했던 칭찬은 '귀엽다'거나 '오늘 잘 달린다'는 것 뿐이었다. 나이가 두 자리수가 되고 나서는 늘상 거울에 비치는 내 상을 피해다녔다.


난 고등학교 3학년 때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자퇴서를 냈다. 부모님은 내가 게을러서 섣부른 선택을 했다며 화를 냈다. 난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자 서울을 떠나 인천 외각으로 향했다.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세 내기에 급급했다. 정시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시를 쓰고 싶었다. 참 미친 사람처럼 썼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흥미를 보였지만 그 사람은 좀있잖아 떠났다. 나는 그 이유도, 경제라는 사정도 모르던 멍청이였다. 아직도 내 속 한 구석에는 누구나 갖는 흔한 바람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고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지하방에서 혼자 얼어갈 것이다.


마흔이 되었을 때 내 부모님은 둘 다 죽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들이 내가 죽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


다시 라이터를 들었다. 내일이 되면 사람들이 내가 여태껏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내 집을 뒤지고 서랍을 뒤질 것이다. 그리고 중얼거릴것이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군, 이런 사람들은 죄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으니까 말이야. 그 생각을 하면 입술을 깨물게 된다. 무의식에서부터 가식만 떨었을 뿐 나는 사실 누구보다 인정욕에 절여져 있다. 구걸하기에는 자존심이 세고 훔치기에는 겁이 많다.


라이터에서 빛이 난다. 내일이 되면 저 백화점, 다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는 저 백화점이 불타오를 것이다. 저 사람들은 항상 빛나는 것을 사랑해 왔고 빛나는 것만 좇아왔다. 그래서 내가 본 모든 그림자들을 자신의 세상에 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 생각이 머금은 저주의 깊이를 깨닫고 나도 놀랐다. 내겐 지금 라이터에서 빛나는 이 작은 불만 해도 경이롭다. 내일도 큰 불이 나겠지만 그 불은 이 모든 빛들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연습삼아 쓰레기통 앞에 놓인 박스 앞에 라이터를 가져다대 보았다. 자칫해서 불이 번지면 번지가 홀딱 타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젊은 가족들이 떠오른다. 나는 잠시 라이터를 끄며 피식 웃었다. 내일은 백화점에 불을 지를 건데 지나다니는 아줌마나 퍼뜩 떠올리다니.


그 순간 마비된 것처럼 온 몸의 뼈마디가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을 비워보니 내게는 달리 미안한 사람도 원망하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단지 내 두 다리가 너무 짧아서 밖에있는 것들이 발맞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녹초가 되어 나는 쓰러진 듯 눈을 감았다. 약을 한 것처럼 몽롱한 와중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고 평온했다. 난 비좁은 화장실의 욕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불타 없어질 것이다. 인어공주처럼 장난감 병정처럼 공기 중으로 흐드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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