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죄
나는 나쁜 사람이다.
나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강간이다. 그 짓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그렇게 어렸을 때는 아니다. 나는 두 발로 설 수 있었고 눈과 귀와 입도 있었고 원한다면 선생님께 다가가 모든 것을 이실직고할 전두엽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무서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궁금했다.
그 때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나쁜 사람이라기 보다는 나쁠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서준이 우리에게 어리숙한 동급생을 두고 ‘쟤로 해보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들이 무서웠던 만큼 성교라는 게 뭘지 궁금했다.
그러나 내 인간성의 악랄함을 논하려면 사건은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과외 선생님의 물감을 훔쳤다. 25만원 짜리 물감이었다. 그깟 물감은 나한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도둑질이라는 것을 하면 기성세대와 내가 제대로 구분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들은 내 자유를 늘상 침해했다. 하루에 세 끼 밥을 먹으라는 것도 내게는 간섭이었고 억압이었다.
나는 내 판단도 믿지 않고 양심도 믿지 않는다. 좋은 인간이었더라면 유혹이 있더라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테면 나와 몇몇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던 여학생을 봤을 때, 본래의 심성대로 따뜻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평상시 아주 큰 압력- 예를 들면 가족의 질타나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든가-이 있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주 작은 무책임의 바람이 부는 순간 그 가면은 날아가버리고 그 속에 들어있던 시꺼먼 꼬마가 고개를 들어 내 허파로 숨을 쉬고 내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보나 인간적인 결함이 있었다. 먼저 도무지 인내라는 걸 할 줄 몰랐다. 일이 안 풀리고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물건을 집어던졌고 그럴 때바다 내 몸 속에 아주 짜증나는 게(예를 들면 이서준의 성기라든가)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좆 된 것 같았다'- 이건 내 메모장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쓴 것이다. 난 뉴스에 나올 사이코패스들을 제외하면 나보다 가족들에게 막말하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건 짜증이 나면 세상에 대한 피해망상 때문에 억울해져서, 내가 기분 나쁜 만큼 남들도 마땅히 기분 나빠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못하는 끔찍한 범죄들이 있다. 그 범죄들은 어느날 내게 전부 다 쾌락을 위한 상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가 정말로 ‘잔인하다, 역겹다’고 느끼는 순간에조차, 내가 여태껏 함부로 하던 망상의 소재들이 돌아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가장 고통스러울 때 가장 흥분됐다.
오래 전에 일어난 $*@%3#$%이라는 살인 사건이 있다. 잔혹한 얘기를 들었을 때의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그 얘기를 들은 날 일상생활이 싫을 정도로 충격받았다. 내가 받은 충격에 대해 일일히 쓰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어떤 부분이 ‘재밌을 것’이냐면, 나는 가능하다면 지구상의 모든 인구의 머리통에 기계를 설치해서 내가 받은 충격을 남들도 똑같이 받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최대한 구체적으로 무엇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남들도 나처럼 절망을 느끼는 법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잘’ 설명할 수도 없으니 생략하자-
이건 죄다 거짓말이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차마 언어로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시신이 되어버리기 전 그 희생자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한다. 죽기 전에 아마 표정이 없었을 것이고 눈빛은 지옥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망해버렸을 것이다. 아주 말랐을 것이고 옷도 입지 않았을 것이고 젖꼭지나 항문이나 질 같은 건 이미 다 찢기고 불타 형체를 모를 동그라미로 변해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거기에 병이나 벌레 사체 같은 게 들어가 있었다. 내장까지 달군 것으로 타버렸고 목구멍까지 정액이며 대소변이 들어차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그때까지 살아 눈을 뜨고 있었다.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점에서는 나나 다자이 오사무나 의견이 같다.
언젠가 너무 메스껍거나 충격받을 때 그 자극을 뇌가 ‘성적 각성’으로 착각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나는 내가 그런 경우이기를 바랐다. 수도 없이 ‘이건 습관이다, 이건 습관이다’고 되뇌었다. 특정 상상으로 흥분하는 습관이 오래 들어, 이제 아무런 감흥도 없고 그저 끔찍함 만이 남아있는 순간에도 뇌가 엉뚱한 반응을 소환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는 편이 더 낫다.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나 자신보다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침에 나는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화장실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내가 조금만 더 내 신체를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났더라면 매우 배고프고 당장 화장실에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분명한 감각은 통증 뿐이었다.
미국에는 자살 충동이 심해질 때 정신병동의 응급실로 갈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대로 있다보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상담실에 가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상담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담을 한다고 내가 훔친 물감이 안 훔친 물감이 되지는 않을 테고 내 뇌 속 파충류 시절부터 간직되어오던 부위가 제거되지는 않을 테고 어떤 말을 듣자마자 그 풍경이 자동으로 상상되는 내 특성이 죽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담사라는 것도 인간이니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마주치면 알아보고 무언가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순간 상담사도 내게 책임져야 할 인간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내가 상담을 받는다는 것도 부끄럽고 누워서 죽는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자기연민에 휩싸인 인간의 헛소리가 아니라, 가능한 한 진심으로 하는 고백인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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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그 사람의 방에서 나온 기록의 전부입니다,” 유한서가 말했다. “그 다음부터는 기록을 빙자한 망상에 가까워서 따로 분류하는 게 좋겠어요.”
“이 글 자체가 망상이에요. 이 사람은 병입니다,” 연채영이 말했다.
“기록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그냥 글, 어쩌면 일종의 문학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유한서가 말했다. “그 편이 더 견딜만 하니까. 병원에 보내는 게 더 낫겠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난 이 인간을 별로 오래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다행이지요. 그렇게 나쁜 인간이었습니까?”
“글쎄. 절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늘상 짜증이었다는 건 사실이야. 고등학교에 있었을 때 너무 우울해보였어.”
“바로 그런 반응을 원했던 게 아닐까요? 애초에 동정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런 글을 왜 쓴단 말이죠? 이건 신세한탄이잖아요.”
“나중에 죗값을 받게 하되 당장은 너무 냉혹하게 나오지 마. 어떤 인간은 죄책감 때문에 문드러져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그것 때문에 굳이 유감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가서 얘기해 보세요.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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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신다면 인터뷰라도 해보실래요?”
강지훈은 자선단체 회장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는 역 근처 가게의 사장이었다. 그는 그 한 해 개인으로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었다. 강지훈은 여태껏 막연히 부유하고 인정많은 사모님 정도로 생각해왔던 사람이 기껏해야 서른을 넘긴지 얼마 안 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다.
“아녜요. 늘 친절히 안내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지요.”
가게 카운터 앞에는 분쟁 지대에 사는 아이들의 사진과 한줄짜리 인사말이 빼곡히 나열돼 있었고 그 뒤 잘 보이지 않는 의자에 걸처진 것은 늙은 노인들의 단칸방을 오가며 입던 후즐근한 청바지였다. 그는 공익광고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이런 내력을 남들에게 굳이 광고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아무나 그를 대략 보았더라면 남을 돕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 정말 깨끗한데요,” 강지훈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세시 반, 손님은 많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건너편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얄밉게도 가게 창 바로 앞에서 그림자에 가리워져버린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올 때마다 방금 닦은 것 같아요. 알바생도 안 구하세요? 혼자 일하기 바쁘실텐데.”
“사람이 할 짓이 아니긴 해요,” 그가 웃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임진열’이라는 이름 석 자가 붙어 있었다. “저야 바쁠 때가 더 편한 편이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보람이 있네요.”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사진이라도 뽑아드릴까요? 어디다 붙여놓을 수라도 있을텐데요.”
임진열은 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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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담을 받는다는 것도 부끄럽고 누워서 죽는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자기연민에 휩싸인 인간의 헛소리가 아니라, 가능한 한 진심으로 하는 고백인데,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긴 생머리카락을 하고 눈이 동그란 여자였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왠지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데리러 왔구나.”
내가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내 말에 대답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난 대화를 하러 왔어.”
“열병이 나서 헛것을 보는 모양인데. 무섭다.”
“가서 세수를 해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나는 겁이 났다.
“여태껏 가짜 사람이 꿈에 나온 적은 없어. 하지만 이게 진짜일 리도 없어. 내가 드디어 가짜와 진짜를 구분 못하게 되었구나.”
“난 네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 여자가 만나고 싶어, 맞지?”
그 말이 경박하게 들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무슨 천명을 받은 신령이라도 집에 들어온 것 같아서 멍한 와중 어쩐지 반갑기까지 했다.
“무슨 여자? 넌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아는 여자들은 싹 다 아니야. 날 치료해줘야 해.”
“누가 널 치료해줄 수 있는데? 누가?”
그녀는 내가 어딘가에서 분명 본 사람 같았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한테 밥을 먹어도 된다고 설득해줄 수 있으면 됐어. 나는 뭘 씹고 싸는 것도 징그러워보여. 누군 그러다가 죽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네가 죽인 게 아니야. 넌 그렇게까지 악인은 아니야. 난 네 안에 선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 사람이 항상 네 안에 있어.”
그 말에 나는 소파에 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 놈이 안 나와.”
“나왔다가 들어간 걸 지도 몰라. 넌 기회가 있다면 말하고 싶었어. 그렇지?”
나는 계속 흐느껴 울었다.
“곧 잊어버릴 줄 알았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가장 잔인한 생각이 뭐였던 것 같아? 기억할 수 있어?”
“모르겠어. 요새는 아무것도 안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
나는 잠깐 멍하니 생각하다 말했다.
“이 말을 한다고 날 너무 미워하지 마. 춥고 커다란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방에는 남자가 한 마흔 명 정도 들어있고, 우리는 계속 어떤 여자를 임신시키고 배를 때려. 그리고 또 임신시키고, 계속 그래. 이건 약과지.”
“네가 원한다면 그만 생각할 수 있잖아, 그렇지?”
나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내용을 바꿀 수 있잖아, 아니야?”
내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내용은 바꿀 수 있지. 그러다가 죽일 수도 있고, 구해줄 수도 있고. 데려가서 내 방에 가둘 수도 있고. 플로리다로 갈 수도 있어.”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야.” 그녀가 말했다. “전부 되돌릴 수 있잖아.”
“그래. 벌받기 무서우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나는 그녀를 올려다 쳐다보았다.
“날 죽여봐,” 그녀가 말했다.
“싫어.”
“그럼 강간해 봐.”
“미쳤어?”
“왜?”
“싫으니까.”
“네가 왜 그렇게 아픈지 알아?”
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이기 때문이야.”
나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이미 잘못되었기 때문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빛에는 내가 읽지 못하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들어 있었다.
“그만큼 더 선하게 살아. 여기서 죽는 게 더 속편한 일이라는 거 알잖아. 이 순간에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수두룩하게 많아.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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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대목이 상대적으로 더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유한서가 말했다. “적어도 사회에 돌아갈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잖아.”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 그 사이 아주 하찮은 외출이라도 있었을지 모르지. 그러다가 지게 끄는 할머니라도 어쩌다 도와주게 됐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인과성이 아예 엉망이네요.”
“응. 저런 얼굴에 말투라면 꼭 임소윤이라는 애를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말이야. 나중에 자기 환각을 짜맞춘 걸지도 모르지.”
“그럴 것 같아요. 꿈에서는 아무거나 튀어나오기도 하니까요.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 믿고 싶던 것들이 저 여자의 말로 투영된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저걸 쓴 후로 다른 인생을 시작한 걸까?”
“그 전에 병원에 실려갔다 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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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열은 천성이 살짝 예민한 편이라서 얼핏 봤을 때는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왜인지 그와 자주 만나본 사람들은 보통 그가 사실은 온화하고 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똑똑한 사람이랑 대화하는 건 항상 재밌어요.”
어느날 어떤 여대생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생물학과에 다니고 있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단골이라도 임진열은 이 사람 저 사람과 말을 트는 성격이 아니었거니와 상대방이 쉽게 말을 붙일 만한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남남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왠일로 이 사람과는 한적한 시간 몇 마디 나눠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임진열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정말로 웃겨서는 아니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응답의 전부였다. 그는 이따금 솔직해질 때 느릿느릿 진부한 냉소를 터뜨리기도 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한숨을 쉬고 마른 세수를 한 다음, 청소 도구를 대충 정리해두고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침대에 드러눕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도 LED 등도 그에게는 약이 아니었다.
일요일 저녁이 되자 그는 버스에 올라타며 헤드셋을 꼈다. 이제 멀리로 갈 때였다. 그는 청소나 번역 같은 봉사에는 관심도 없었다. 인간이 관여된 일을 해야 했다. 알던 선생님은 그처럼 젊고 불안정하고 앞날이 많이 남은 사람이 남은 잔액을 짜내서 죽어가는 어르신들을 밥 먹인 다는 게 우습게 느껴진다고도 했었다. 그런 객관적인 감상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도 기부를 했다. 하지만 돈 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었다.
‘멍청한 생각이야.’
주변 사람 몇몇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에게 엑셀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는 본래 아이들을 어려워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한 번도 아이들 때문에 싫증 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보통은 짜증냈을 법한 일에도 그는 항상 호의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관대했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나이도 비슷해서 적잖이 아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임진열은 ‘요새 더워졌지 않아요?’나 ‘피아노를 잘 치시네요’같은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건 이문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찮게도 제법 가까워질 기회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결국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거의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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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이 맞을까?”
“여기 오기 방금 전에도 물어봤었어요. 아니라면 정말 더럽게 재수가 없는 거겠죠.”
유한서가 묻자 연채영이 대답했다. 둘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3층, 13층이란 말이지. 그 인간을 만나서 정확한 일을 들어야겠어.”
“하지만 그걸 들어서 뭐가 좋은 거죠?”
연채영의 물음에 유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난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해야겠어. 여태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야. 가장 확신할 수 없는 건, 대체 이서준이 누구고, 그 때 무슨 일을 했느냐는 거야. 내 주변에 그런 애는 없었어.”
“멀리 살았었나 보죠.”
연채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어쨌건 나는 한 번 일을 정리해야만 해. 그 여자애는- 임진열 씨의 기록에서 어떤 인간 정도로 지나가버린 그 여자애는 내 동생이었단 말이지.”
연채영은 잠시간 말을 멈췄다.
“이례적으로 침착했는 걸. 한서 씨, 난 매우 놀랐어요.”
유한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게, 사실은, 나도 내내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차분해보였다. 둘의 발걸음이 어느 집 앞에서 멈추어섰다. 연채영이 벨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느닷없이 외침 소리가 들렸다.
“멈춰요! 멈 춰!”
유한서와 연채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채영이 물었다.
“뭘 멈추라는 말입니까? 당신이 집주인 입니까?”
저 사람이 임진열이라는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 그가 횡설수설 말을 잇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당신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 사람, 원래 저 집에 살고 있던 사람 말입니다……. 오래 전에 죽었어요.”
“뭐라고요? 그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기 살던 사람의 동창 친구입니다.” 그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기 때문에 유한서는 엉겁결에 서양식으로 악수를 했다. “정다니엘이라고 합니다. 혹시 저희 집에 오시겠습니까?”
연채영은 유한서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는 말했다.
“그럴 건 없습니다. 다만……”
유한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한나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정다니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유한서의 손을 쳐다볼 뿐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여자와 무슨 관계입니까?”
“난 그 여자의 가족입니다.”
정다니엘의 표정은 한 순간에 텅 비어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난 모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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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들에게 엑셀을 가르치던 무렵, 마침 비슷한 시기에 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임신한지 몇 달이 지나 배가 나와 있었다. 나는 ‘요새 더워졌지 않아요?’나 ‘피아노를 잘 치시네요’같은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건 이문영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로부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일을 마치고 열한 시 무렵 집에 가던 때였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13층을 눌렀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집문 앞에 키가 큰 낯선 남자가 모자를 쓴 채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추어섰다. 순간 목 뒤가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애써 헛기침을 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아주 오래전에 알던 사람이었다. 누군지 알아채기 전부터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정다니엘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그냥 다시 닫히도록, 그래서 내가 1층으로 내려와 저벅저벅 멀어지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지 않자 정다니엘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내 집이야. 비켜.”
정다니엘이 이상하게 웃었다.
“난 바로 아랫집에 살아. 이사 온지 일주일은 됐어.”
나는 슬쩍 층을 확인했다. 그를 무시하고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무렵, 그가 내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한 순간 나는 그가 나를 때릴 거라고 생각했다.
“어우, 바지에 흙 좀 봐.”
그러나 그는 난데없이 어설프게 무릎을 반 쯤 꿇고 내 다리에 묻은 흙을 털 뿐이었다. 난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았다.
“……가.”
내가 돌아서자 그가 다시 나를 붙잡았다. 나는 화가 나서 그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자꾸 나한테 화내지 마. 어제 아침에 사람들이 너한테 찾아왔어. 알다시피 나쁜 일이야.”
나는 온 몸이 실신할 것처럼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하하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신경쓰지 마. 내가 넌 죽었다고 했어.”
잘했어, 하마터면 입에서 그 말이 터져나올 뻔했다. 그러나 입술만 꿈틀했을 뿐 혀는 뻣뻣이 굳어 있었다.
“넌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어느새 그는 나와 집 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엘리베이터 안 쪽으로 끌다시피 이끌었다. 난 이제 정말로 저 놈이 날 두들겨 패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층에 다다랐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은 아주 뜬금없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봤는데…… 네가 만나는 여자 있잖아, 그 임산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들었지?”
헛소리 하면 내가 먼저 때릴거야.
그가 계속 말했다.
“그…… 돌림빵 당했거든. 웃기지?” 그는 내 손에 담배를 쥐여주며 웃었다. “어, 천천히 운을 떼보자. 유한나 기억날 거 아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한테는 미안한 것도 있고, 고마운 것도 있고……. 하여튼, 우리는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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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니엘의 표정은 한 순간에 텅 비어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갑자기 미꾸라지처럼 어딘가로 미끄러져 사라질 것 같이 뒤로 흐느적흐느적 물러나고 있었다.
“당신 어디 삽니까?”
유한서가 다짜고짜 물었다.
“임진열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니까요.”
정다니엘이 바득바득 우겼다. 그는 모자를 쓰고 입에 사탕을 물고 있었는데, 키는 190cm나 되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쁘게 껄렁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연채영은 생각했다. 저런 식으로 따져봐야 멍청한 짓이라고.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정……다니엘이라고 하셨죠? 마침 잘됐군요. 우리는 임진열하고 당신은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어차피 당신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다만 일이 커지기 전에 간단한 증언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정다니엘은 느릿느릿 답했다.
“그러시군요. 그러시군요. 하지만 정말로 나는 모른다니까요. 요새 걔네들은 만나지 않습니다.”
연채영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딱 그 말대로 기록해두겠습니다. 나중에 뵈요.”
그들이 갈 준비를 하자 정다니엘이 소리쳤다.
“나중에 본다니! 니네들 미쳤어? 난 당신과 다시 볼 생각 없어.”
연채영과 유한서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하아……. 좋습니다……. 일단은 째끔 아는대로 말을 해 보겠습니다. 생각이 날락말락 하지만…….”
“결론은 그 여자가 당신들한테 임신을 했으니 피임 비용을 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걔네들이 당신에게 전액을 내놓으라고 했고, 그래서 당신은 임진열이라는 인간에게 가서 뜯었다는 겁니까?”
“대충은, 대충은 그런 느낌입니다.”
유한서가 말했다.
“제가 들은 거 하고는 다른데요. 임진열 씨는 자기가 성폭행을 했다고 주장했거든요.”
정다니엘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랬었나? 하여튼 걔도 알고는 있었겠죠?”
연채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유한서에게 말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지 않습니까. 어차피 임진열은 병이라고요. 그만 당신 동생에게 가보는 편이 좋겠어요. 만일 저게 모두 사실이라면 당신이 몰랐다는 것도 잘못된 일이고요. 다시는 이런 데 오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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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3층에 있는 내 집에 누워 있었다. 소파 오른편에는 담배 꽁초와 휴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난 혼이 내 눈과 코와 입을 통해서 술술 빠져나가는 것처럼 힘이 없었다.
아직도 정다니엘은 바로 아래층에서 살고 있다. 이서준은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꿨다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또다시 누군가가, 정다니엘이 말했던 사람들이 날 찾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난 사람들에게 내가 오랫동안 쉴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월세나 다른 귀찮은 일들에 대해서는 뇌가 깨질 것 같지만 차마 달리 방도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영영 일어서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다만 귀신이 나를 도로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돌아와서 내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병원에 가게 될 거야.
그러나 그것이 다시 오려면 기약 없이 더 누워있어야 할 것 같다.
내 눈은 죄를 지었다. 그것은 바로 하필이면 내가 이문영의 몸을 본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서이든 그녀를 위해서이든 이문영을 도와야만 한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고 그녀가 정말로 필요로 할 법한 최소한의 것이라도 경청해야한다. 그러나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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